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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구의 증명>은 사랑하는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겪게 되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 혹은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최진영은 퇴색하지 않는 사랑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아름다운 문장과 감성적이며 애절한 감수성을 통해 젊고 아름다운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냉정한 죽음에 대해 세련된 감성과 탁월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 출처 : yes24 책소개
구의 증명 속 문장들
깊은 밤 잠 못 드는 몸처럼 이리저리 뒤척이던 걱정과 바람, 쇄골까지 내려온 구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니 푸석한 머리칼이 한 움큼 빠졌다.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버릴 수 없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밤은 천천히 가고 비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구는 숨 쉬지 않았다. p.13 구의 증명(최진영)
사랑을 넘어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상대의 죽음을 바라보는 담의 마음은 어땠을까. 차마 버리지 못해 스스로 먹어야만 하는 마음도. 모든 것은 살아서 흐르고 있는데 유일한 사람은 유일하게 멈춰있는 고요의 순간. 담은 함께 죽고 싶었을까. 머리카락이 쇄골까지 내려오도록 그들은 한치의 여유도 없는 삶을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자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p.21 구의 증명(최진영)
인생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나쁜 일도 두려운 일도 의문도 없는 평온한 생을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무슨 일이 생길지 다 알게 된다면 꿈도 희망도 꿀 필요가 없지 않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결과도 모른 채 지금 열심히 실아간다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좋지 않을 결과를 불러올지라도 열심히 해왔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p.23 구의 증명(최진영)
왜 해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답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왜 그때 이야기 해주지 않았냐고 타박을 해본들 그 시절의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상대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비로소 진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무거운 짐을 이고 나르며 몸을 쓰는 일을 할 때는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아 좋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걱정이라고 했다. 힘든 일할 때 시간이 빨리 가면 좋잖아.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 속도로 내 삶이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 무서워. 주저하며 구가 대답했다. 한참 후에 덧붙였다. 그렇게 늙어버리는 거 순간일 것 같아. 주저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대꾸했다.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절대로. p.67 구의 증명(최진영)
가만히 있기엔 걱정할 거리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손이며 발이며 쉬지 않고 움직이며 혹사시켜야 사라지는 가난과 불행들은 시간을 담보로 가져가 버린다. 눈 깜짝하면 한 달, 두 달이 지나가 버리고 내가 가진 불행은 그대로인데 나만 멀어져 가는 그 기분의 초조함.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바뀔 거 같지 않은 현실과 그럼에도 움직여야만 하는 현실사이에 갇힌 구의 굴레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근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친해져? 노마가 다시 물었다.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누군가도 네 마음을 모를 리 없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형이랑 누나는 사귀는 거 맞지? 노마가 물었다. 구와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우리는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였다. p.76 구의 증명(최진영)
어쩌면 구와 담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부족한 하나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처럼. 사귄다는 것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만나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를 사이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둘 중에 한 명은 괜찮았을지도.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대접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대접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p.80 구의 증명(최진영)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만있어도 귀한 사람이 되는 반면 쉴 틈 없이 일해도 사람취급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누가 정해준 기준인가. 왜 가난은 대물림되고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건지. 결국 도망가는 것도 약자. 숨어야 하는 것도 약자인 세상의 굴레가 안타깝다.
종무소 구석에는 여전히 기왓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나는 구에게 물었다. 저 기왓장에 소원을 써야 한다면 어떤 문장을 쓰겠느냐고. 곰곰 생각하던 구가 대답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나는 구의 말을 마음으로 따라 했다. 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안 된다면 이번 생은 빨리 감기로 돌려주세요. 그럼 빨리 죽잖아.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p.128 구의 증명(최진영)
끝이 보이지 않는 불행은 결국 스스로의 파멸을 바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욕심을 내면 살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걸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대도 그 평범조차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바랄 수가 없나 보다.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편한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것.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지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좀 더 좋아질 미래가 아닌, 가장 나빠질 경우부터 상상하는 버릇이 생긴 게. 가진 건 몸뚱이 하나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모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었고, 돈을 빌려준 자들 입에서도 나온 말이었다. 몸뚱이...... 몸은 인격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고기. 사람이라는 물건. 사람이라는 도구.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영혼 값은 달랐다. p.144 구의 증명(최진영)
살아감에 있어 움직일 수 있는 멀쩡한 몸만 있다고 해서 최악이 아니라는 말은 아닐 텐데.. 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마음도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구도 한 때는 희망을 꿈꾸던 때가 있었을 테다. 조금만 지나면.. 내년이 되면.. 그 희망을 잘라낸 건 자신이지만 자를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남겨둔 어른들 때문이리라. 왜 부모조차 구를 보호해 주지 못했을까.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의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이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p.149 구의 증명(최진영)
가난의 힘이란 대단하다. 가난의 세계는 너무 가혹하고 가혹하다. 성인이 되자마자 받아야 하는 게 가난의 짐이라면 어느 누가 어른이 되고 싶달까. 짐을 물려줄 것이면 해결방법도 알려줄 것이지. 마치 구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린 것처럼. 그들에게 자식이란 자신의 짐을 나누는 존재일 뿐인 걸까. 사랑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살아갈 길은 만들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도 쭉 안 될 거 같잖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야. 다시 구를 기다리면 살 자신이 없었다. p.151 구의 증명(최진영)
어릴 적 구가 담의 손을 놓았던 건 그만큼 담의 미래가 소중했기 때문이겠지. 나약하고 초라한 자신과 닿은 담이 똑같아질까 봐. 기왕이면 강하고 돈 많은 사람 곁에서 행복하길 바랐던 마음을 담은 몰랐을까. 행복해지기 위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지더라도 네가 옆에 있다면 괜찮다는 그 마음이란. 담이 정말 헤어지자고 했자면 구는 아마 울었겠지.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p.167 구의 증명(최진영)
비록 희망은 잘라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존재가 자신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그 존재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 아닐까. 가질 수 있는 게 없어도 담이만 있다면 살아가겠다 다짐했을 구의 마음이 슬프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분명 행복하기만 한 일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살겠다 마음먹은 구에게 닥친 죽음은 마치 신의 장난 같기도 악마의 선물 같기도 한 건 왜일까.
고독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야 죽었다고 사라지진 않을 테지만, 물질에 가까운 욕심이나 이기심에서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허기도 병도 몸도 없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가질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죽음이 좀 덜 무섭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171 구의 증명(최진영)
죽은 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담을 슬프게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안심되는 것은 구가 이젠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추위도 가난도 걱정도 이젠 아무것도 하지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먼저 죽어버린 구를 원망하는 담의 마음엔 슬퍼하는 구를 안 봐도 될 테니까. 비록 남은 담은 그런 구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담은 채 외롭게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한 사람은 남아있어야 하고, 왠지 담은 계속 살아갈 거라 믿고 싶은 마음도 있다.
여기 네가 있다.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여기 없거나 내가 여기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싶다가도,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 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p.172 구의 증명(최진영)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은 늘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살겠지. 그 그리움의 끝에 떠난 이의 영혼 한 자락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느 날엔 꿈에 나타나 안부를 물을지도. 떠난 이도 남은 이의 행복을 바라고 슬픔을 아파할지도 모른다. 비록 보이지 않을 뿐. 그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테고. 그래서 아마 담도 천 년 넘게 살고 싶었겠지. 구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젠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구의 쓸쓸한 인생도 담의 비틀린 사랑도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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